운명처럼 내 앞에 놓인
순수한 하나의 여백
거기에 나는 유언을 쓸까.
오래 숨겨 놓은 비밀을 고백할까.
증인처럼 등불이 지켜보고 있고
사위에 정적이 에워싸는 밤
나는 최후처럼 백지 앞에 앉아
한 마디의 마지막 낱말을 찾고 있다.
창밖은 12월, 계절을 휩쓸어가는 북풍이 불고
어지러운 구름 사이로
반 남아 이지러진 조각달 헤매어간다
달빛을 가린 구름장이여,
잠깐 비켜나 달님의 얼굴을 보게 해다오.
이 밤에 내 마음도
구름 사이 헤매는 이지러진 조각달
아직도 백지로 놓여 있는 종이 위엔
그대 모습 어지러이 그릴 길 없고
처음도 끝도 잊은 백지의 사연 위에
부서진 마음 조각만 촛불처럼 가물거린다.
공포처럼 놓여 있는 운명 앞에
차라리 나는 두 눈을 감을까.
영영 여백으로 남아 있을 백지
끝내 알맞은 단어를 찾지 못하고
백지 위엔 까만 정적만 기어 내린다.
- 문병란 / 백지 앞에서 -
Dolores O’Riordan - Wilow Pattern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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