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삶, 인생

책장을 넘기며 / 오세영

by LeeT. 2023. 11. 19.

2023.10.11.

샛바람 불어 지면은
온통 만남의 이야기다.
연분홍 처녀들의 다소곳한 기다림과
물 건너서 달려온 초록 사내들의 다정한 눈길.
 
마파람 불어 지면은
온통 사랑의 이야기다.
격정에 휘몰아치던 그 날 밤의 폭우와
땀에 흠뻑 젖은 숲들의 가쁜 숨결.
 
하늬바람 불어 지면은
온통 이별의 이야기다.
잿빛 노을 앞에서 쓸쓸히 손 흔들며
돌아서는 그의 빈 어깨.
 
된바람 불어 지면은
이제 온통 그리움의 이야기다.
백지 위에 나뒹구는 연필심처럼
눈밭에 우두커니 서 있는 한 그루의 부러진 나목.
 
바람이 분다.
운명의 책장들을 넘긴다.
다시 살아야겠다.
 
- 오세영 / 책장을 넘기며 -

 

Rachel Rachel - Time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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